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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4>

by mathilda72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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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목차

 

- 글을 시작하면서 -

 

1. 유년 시절의 셰익스피어

 

1) 가정환경

 

2) 교육환경

 

 

2. 셰익스피어의 직업

 

 1) 셰익스피어와 런던

 

2) ‘배우로서의 삶

 

3) ‘극작가로서의 삶

 

4) ‘극장 경영인으로서의 삶

 

 

3.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삶

 

1) 사인(死因)

 

2) 유언장

 

3) 묘비(墓碑)

 

 
- 1613년에, 자신의 애정 어린 ‘우주극장(The Globe)’의 화재로 인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책, 편지 등이 불에 타버려 재가 되는 일들은 그의 인생의 말년에 일어나게 되었고, 1616년 초부터 악화된 그의 건강 상태로 인하여 변호사를 통하여 미리 유언장을 작성(1616년 1월)하고 그 해 4월에 자신의 New Place 저택에서 눈을 감게 되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52세였다.
 

 

<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3>

더보기 목차 - 글을 시작하면서 - 1. 유년 시절의 셰익스피어 1) 가정환경 2) 교육환경 2. 셰익스피어의 직업 1) 셰익스피어와 런던 2) ‘배우’로서의 삶 - 장남으로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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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Place 저택의 내부모습

 
3.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삶

 

1) 사인(死因)

 

- 그의 사망의 원인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하여 지지만, 스트랫포드의 목사였던 John Ward 목사는 셰익스피어의 1차적인 사인은 과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진술하였고 Bidford라는 마을에서 그가 술을 과하게 먹는 버릇이 있었다고 전하여지기도 하였으며, 작품 『햄릿』에서는 과음을 경고하는 내용도 등장한다.
 

호레이쇼: 저들은(과음한 덴마크인들) 항상 저럴까요?

햄릿: 그렇더군. 난 여기서 태어나고 이 나라의 풍습을 따르고 살지만,
이건(술을 진탕 먹는 버릇) 따르기보다는 단절하는 게 훨씬 좋을 거라 생각한다네.
우리 눈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치 없어 보이고 비난을 많이 받는 것은 저런
술버릇 때문이라 생각한다네. 우리를 술주정꾼이라 부르고 돼지라 놀려대면서 우리 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은 그들이란 말이지.

 

2) 유언장
 

- 8살 연상이었던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와 18세에 혼인하였던 셰익스피어는 큰 딸인 수잔나와 쌍둥이 남매까지 얻게 되나 아들은 12세에 사망한다.
 
- 자신의 재산에 대해 대부분의 상속권을 큰딸 수잔나에게 상속하였으나 당시 법을 따르자면 재산의 1/3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 것에 대해 여러 가지의 회의론적인 설이 등장을 하게 된다.
 
- 설에 의하면 아내와 자녀를 고향에 두고 홀로 런던에 생활하고, 아내에게 남긴 편지 한 장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작가가 아내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는 것인데,
 
- 당시의 영국사회는 남편이 먼저 사망을 하면 아내에게는 가정에서 가장 특별한 가구를 아내에게 남긴다는 풍습을 따라서 가구를 남겼을 것이라 추정된다. 앤에게는 신혼 시절의 추억이 담긴 가구였기에 소중한유산이었을 것이고, 공동소유로 구입한 그의 가옥이 있다 하더라도 몇몇 지인들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기에 아내가 상속을 받기에는 법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 그리고 8살이나 연상이었던 아내가 이 복잡한 재산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재산권을 행사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작가가 생전에 장녀 수잔나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캠브리지 대학 출신의 의사가 큰 사위였기 때문에, 오히려 큰 딸의 유산 상속을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이 수긍하였을 것이다.
 
- 가족 외에도 고향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10파운드의 유산을 남긴 그는, 스트랫포드 출신의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와서 큰 활약을 하였고 극작가와 배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음은, John Heminges, Richard Burbage, Henry Condell과 같이 우정을 나누었던 동료배우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작가의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되어지는 바이다.
 
- 집필을 하면서 상당한 양의 서적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이에 관하여 유언장에는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거주하였던 New Place를 상속 받았던 큰사위가 사망한 이후에, 서재가 발견이 되는데, 이곳에 장인이었던 셰익스피어에게 물려받았을 것이라 추정되어지는 많은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전하여진다.

 

 

3) 묘비(墓碑)명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e to digg the dust encloased heare. Bleste be the man that spares thies stones, and curst be he that moves my bones.

 
친구들이여, 바라건대, 이곳의 티끌도 파헤치지 말아라. 이 무덤의 석판을 건드리지 않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이며, 나의 뼈를 손대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 쓰인 묘비명이다. 이 교회에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작가 사망 후 7년 뒤에는 아내인 앤, 그리고 장녀 수잔나도 이곳에 안장이 되어 지면서, 이 곳은 가족의 무덤이 되었다.
 

성 트리니티 교회 (Holy Trinity Church) 와 셰익스피어의 묘비

 
- 그의 무덤에는 자신이 훌륭한 문학사적인 업적을 남겼으니, 길이 기억된 감동적인 문구가 남겨졌을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닌 왜 이런 저주의 문구를 묘비명을 새겼는지에 대해 두 가지 추정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당시에는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가 시신을 새로이 매장할 자리 확보를 위해 기존에 묻혀있던 시신을 파내고 화장하는 일이 흔했다는 점, 그리고 영원히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소망이 묘비명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다소 불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 우리나라의 한 공중파 채널에서 '셰익스피어의 저주' 편이 전파를 타게 되어 흥미롭게 시청하였던 경험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무덤이 있던 영국의 트리니티 교회는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무덤을 넓은 곳으로 옮길 계획을 하였으나,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운영하던 회사의 부도를 피하지 못하는 등의 실제 발생한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결국 잇달아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 정말 묘비에 새겨진 셰익스피어의 저주때문에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의 생전에도 여러면에서 미스테리한 작가였고 그의 사후도 예사롭지 않은 에피소드를 지닌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사망한지 400여년이라는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무덤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상태로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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