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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2>

by mathilda72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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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1>

 

목차

 

- 글을 시작하면서 -

 

1. 유년 시절의 셰익스피어

 

1) 가정환경

 

2) 교육환경

 
2. 셰익스피어의 직업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작가로 알고 있으며,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접근하며 셰익스피어가 남긴 문학 작품을 이해하다 보면 그는 작가로서만 존재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셰익스피어와 런던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스트랫포드는 상업의 요지였고 그래서 교통 환경도 발달되었던 만큼, 당시의 상인들은 런던과 스트랫포드를 자주 오갔으며, 기록에 의하면 스트랫포드의 어떤 소년은 런던에 와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는 실제 이야기가 존재할 만큼, 런던이라는 도시는 스트랫포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주는 곳이라 여겨졌었기에 상인들은 런던으로 와서 상업과 법률을 빈번히 접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자녀에게 런던으로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며, 굳이 부모님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런던에 홀로 입성하였을 젊은이들도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1>

- 글을 시작하면서 - 영국문학에 대해 블로그의 문을 열었을 때,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의 작품을 설명할 때도 그러하였지만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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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1586년에 셰익스피어도 런던에 입성하게 된다. 1582년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던 그가, 1586년부터 무려 11년간 고향인 스트랫포드의 어떠한 문서상에도 그의 행적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아버지 존이 파산하자 생활고를 해결하러 대도시 런던에 갔을 가능성, 극에 관심이 있어 스트랫포드 지역의 순회공연을 하러 온 극단과 함께하여 배우로 성공하고자 런던으로 갔다는 가능성, 마지막으로 밀렵을 하여 처벌을 피하러 고향을 버리고 런던행을 택하였을 것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그가 런던에 입성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말한다.
 
- 그가 살던 시기에는 3개월 감금, 3배의 손해배상을 실제로 집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이 처벌은 밀렵 중에서도 사슴을 밀렵하였을 때 시행되었다고 전하여 진다. 그래서 친구들과 그가 사슴을 몰래 사냥하여 심한 벌을 받기도 했던 일화가 있는 만큼 돈을 벌고, 배우로서의 삶을 위한 이유와 더불어 처벌을 피하려 런던에 오게 되는 것과 같이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런던의 타워 브리지 (Tower Bridge)가 열리는 모습

 
- 런던에 그는 나름 그 도시에서 인쇄소의 연습공 등 직업을 지니고 있었던 동향 친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나간다. 이 중에서도, 아버지들끼리도 남다른 친분관계였고, 18세에 런던의 이름 있는 인쇄소의 연습생으로 시작하여 인쇄소 주인의 사망으로 주인의 아내와 결혼하여 인쇄소를 비롯해 출판 사업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리처드 필드(Richard Field)와의 관계 유지를 이어오면서, 이 친구의 영향으로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 『루크리스의 능욕(The Rape of Lucrece)』 라는 셰익스피어 첫 작품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됨과 동시에 든든한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Earl of Southhampton)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 후에 그의 도움으로 궁정에 들어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궁정 안에 있는 극단의 전속 극작가로 임명된다.
 

『 비너스와 아도니스 』 picture by Lemoyne

 
- 셰익스피어가 법률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사무소에서 근무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이는 1604년에 발표한 희극 『이척보척』(Measure for Measure), 우리가 알고 있는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과 같은 작품들로 인하여 추정되어지지만, 작품에서 그의 법에 관한 서술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법률적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족한 법 지식을 갖고 있다고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법과 관련된 내용이 그의 작품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 성장해온 도시와 소송, 토지 구매 등 부친의 일을 도우면서 경험하였던, 그래서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법률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 문구는 자신의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변호사를 풍자한 내용이 있는 작품 『햄릿』의 일부분이다.
 

Hamlet: There’s another. Why may not that be the skull of a lawyer? Where be his quiddities now, his quillities, his cases, his tenures, and his tricks? Why does he suffer this rude knave now to knock him about the sconce with a dirty shovel, and will not tell him of his action of battery?

 
햄릿: 또 하나가 나오는군. 저건 변호사 해골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능수능란한 궤변과 달변은 다 어디로 간 거야? 그 소송, 권리증서, 그 술수는 다 어디로 간 거냐고? 더러운 삽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이 천한 자(무덤파는 광대를 지칭)를 왜 내버려 두는 거지? 폭행죄로 소송하겠노라는 말 한마디도 못 하는 거야?

 

 

2) ‘배우’로서의 삶
 

- 성인 남성과 소수의 소년 12명이 배우로 구성되어 활동하였던 극단이 존재하였는데,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왔을 때 7개의 극단이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 영국사회는 여성들에게 배우 허가증을 허용하지 않아, 소년 배우들이 여성의 역할을 대신 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배우는 사회적으로 그 지위가 인정을 받는 계층에 속해 있었던 만큼 배우가 전문적인 직업군으로 인정받았으며, 배우는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여왕의 극단’이라 하여 왕실의 허가를 받은 배우들도 있었다고 전하여 진다.
 
-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전문 배우들과 함께 공연한 기록은 실존하고 있으며, 1592년 출판업자였던 Chettle와 17세기 배우 William Beeston는 각각 그가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라고 극찬을 하였다고 한다. 1594년에는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공연도하고 상금을 받았다고 기록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배우로서의 연기력은 상당히 인정을 받았다고 보인다.
 
- 다음은 작품 『햄릿』에서 엿볼 수 있는 당시 배우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for they are the abstract and brief chronicles of the time

배우란, 시대의 축약도이자, 동시에 연대기이기 때문이야.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 2>

더보기 목차 1. 1기 작품(1590~1594)의 성향 2. 『말괄량이 길들이기』 3. 2기 작품(1595~1600)의 성향 4. 『베니스의 상인』 5. 3기 작품(1600~1608)의 성향 -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 불리는 『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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