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의 말년 1, 2>
목차
- 글을 시작하면서 -
1. 유년 시절의 셰익스피어
1) 가정환경
2) 교육환경
2. 셰익스피어의 직업
1) 셰익스피어와 런던
2) ‘배우’로서의 삶
- 장남으로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동시대에 전문직이라 할 수 있었던 ‘배우’에 대한 동경을 품고, 그리고 사슴 밀렵에 대해 당시의 법의 강력한 처벌을 피하고자 런던에 셰익스피어가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어떤 사유에 의해 그가 런던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한 것은 없으나, 그는 1596년 이후에 런던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그의 첫 작품을 출판하였고, 배우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더 살펴보고자 한다.
3) ‘극작가’로서의 삶
- 영국은 1582년부터,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 출신의 존 릴리(John Lyly, 1553~1606년), 캠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 출신의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그리고 대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지만 라틴어에 정통하였던 토머스 키드(Thomas Kyd)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류의 극이 극단에 등장하게 된다.
- 이 새로운 극은 순수 비극을 영어로 시도해보면서 고전 비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용을 담게 되었고, 지난 글에서 등장하였고,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의 작가였던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 1564~1593)의 작품을 통하여 영어 비극이 극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지만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그가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그리고 말로우가 사망하였던 1593년에 작가이자 배우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던 상황에 대해 말로우가 차려 놓은 밥상에 셰익스피어가 숟가락을 올린 것처럼,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말로우와 대학 동기이자 영국 비극의 첫 삽을 들었던 로버트 그린은 시골출신에 학벌도 별 볼일 없었던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극 작품을 발표하여 유명세를 치르게 되자 다음과 같은 비난을 하게 된다.
“벼락출세한 촌뜨기가 우리들의 화려한 깃털을 예쁘게 꾸미고 있는데, 자신이 죄상의 문구를 충분히 지어낼 수 있다고 장담하며 모든 시의 구절에 막힘이 없는 도사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저 허풍쟁이는 자신의 독창력으로 글을 쓴다면 그의 머리는 텅 비어 있어 그의 펜은 덜덜 떨릴 터인데,
그 장면(Shake-scene : 셰익스피어를 풍자한 말)이 참 가관 일게야.”
- 그들은 말로우의 작품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인간의 끝없는 야망을 소재로 결말이 비극적이라는 공통적인 주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헨리 4세』 등의 셰익스피어 작품이 원래는 말로우가 쓴 부분도 있었으나 말로우가 사망한 후에 이 부분을 수정하여 완성했을 것이라는 말들을 했는데, 이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독창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 받고도 있다.
-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면서, 이를 작가의 개성대로 만든 ‘번안’한 것으로, 토머스 키드(Thomas Kyd)의 작품 『Ur-Hamlet』의 주제와 내용을 비롯한 작품의 구성이 비슷한 작품이 『햄릿』이며, 또 다른 그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이야기가 영어로 편찬된 작품이고, 존 릴리(John Lyly)의 영향을 받아 『사랑의 헛수고』라는 작품도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이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대해 그의 작품에는 독창적인 면이 부족했으리라 평하며 그를 비난한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는 셰익스피어만이 할 수 있었던 언어의 세계에서 그의 독창성은 단연 돋보인다. 그는 극작가, 배우, 그리고 극장을 경영하는 경영주로서 삶을 살아가며 바쁘게 지내지만 매년 2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한번 펜을 잡으면 고치지 않고 거침없이 글을 쓴다.’라는 말로 극작가 벤 존슨(Ben Johnson)이 그를 회상하였다고 전하여진다.
- 사우샘프턴 백작(Earl of Southhampton)이 셰익스피어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일종의 백작에게 헌정하는 형태로 쓰여진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와 『루크리스의 능욕(The Rape of Lucrece)』 는 1598년에 시인 리처드 반필드(Richard Barnfield, 1574~1620)에 의해 ‘그대, 셰익스피어, 그대의 글에는 달콤한 꿀이 흐르는 듯 하는구나’라는 칭송을, 또 다른 동시대의 작가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은 가명으로 그의 작품에 찬사를 남겼다고 한다.
4) ‘극장 경영인’으로서의 삶
- 1599년 ‘우주극장(The Globe)’이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6명의 이름으로 운영되어진다. 이 때 그의 나이가 35세였고, 이 극장의 주주로 극장 경영을 하게 되는데, 그가 실질적인 극장 운영을 했다는 사실은 인수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등재되지 아니하였다는 서류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셰익스피어는 ‘블랙프라이어스 극장(Blackfriars threatre)’이라는 극장을 소유한 동료 배우 리처드 버비지(Richard Burbage)의 소유권의 일부를 갖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서류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 1600석의 규모를 갖춘 당시 런던에서 유명했던 ‘우주극장(The Globe)’은 자신의 여러 작품이 첫 상연되어진 극장으로, 『헨리 5세』공연에서는 이 극장이 ‘투계장’, ‘목자재로 된 O자형’이라 묘사되어진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유명했던 극장인 만큼 그 수입도 상당하였으나 이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다른 주주들과 법적인 분쟁도 잦았다. 그러나 1613년 6월 공연 도중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614년 재건되었다가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철거되는 등 아픔이 있었던 이 극장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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