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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

by mathilda72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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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1세(1566~1625)

-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혼인하지 않고 후계자 없이사망하자, 혈통적으로 보았을 때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의 자격이 있었던  제임스 6세이자 동시에 제임스 1세인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어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공동 국왕으로 영국은 스튜어트(Stuart) 왕조를 맞이하게 된다.

 

 

< 튜더(Tudor) 왕조 >

1. 16세기 영국 사회 대내적으로는 흑사병과 농민의 반란,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백년전쟁(1337~1453)을 겪은 중세 말기의 영국은 영주들의 세력은 약해지면서 봉건제도가 흔들리게 되었으며, 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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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6세는 그의  증조모이자 외증조모가, 튜더 왕조를 열었던 영국의 헨리 7세의 장녀인 마거릿 튜더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그가 영국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와의 사이에서 제임스 5세를 낳았고 그녀의 아들 제임스 5세의 딸 메리는 아버지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메리가 사촌이자, 마거릿이 재혼하여 낳은 아들인 헨리 스튜어트와 혼인하여 얻은 아들이 제임스 6세이다.
 
- 다소 복잡한 촌수(寸數)로 얽혀있기는 하나 왕실의 혈통을 위한 그 시대의 사회적 현상이라 여겨진다.
 
- 제임스 5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된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는 실정을 거듭한 끝에 1567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난 뒤에 잉글랜드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녀의 왕위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 제임스(제임스 6세)가 이어받았고, 1603년에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공동 국왕이 된다.
 
- 제임스 시대에는, 의회가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을 둘러싸고 국왕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엘리자베스 1세 때와는 달리,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의회의 세력이 강력하다보니, 제임스 6세이자 제임스 1세인 왕은 이러한 신규 세력에 대한 충분한 평가를 하지 못한데다가 의회에 부여된 특권이나 관행에도 무지하였으니 종교와 재정, 그리고 외교 문제로 난관을 겪을때마다 의회와 대립을 하게 된다.
 
- 이에 제임스 1세는 1609년에 “왕이 신으로 불리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왕은 지상에서 신이 기지고 있는 권력과도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모든 신민(臣民)을 심판하며, 아울러 신(神) 이외에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라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주장하게 된다.
 

2. 찰스1세(1625~1649)

 
- 제임스 1세를 이을 향후 왕통은 외모나 재능, 성품 면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왕세자에 걸맞게 훌륭히 성장한 장남 헨리에게 주어졌으나 헨리가 18살에 사망하자 왕위를 차남인 찰스1세가 물려받게 된다.
 
- 아버지 제임스 1세가 주장한 왕권신수설의 옹호자로서, 찰스1세는 왕권을 승계 받고 즉위하여 종교적인 갈등을 잠재우기는 하였으나 왕은 신이 부여한 절대 권위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왕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회의 존재는 왕권에 도전이자 원칙적으로 부당한 것이라고 까지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신앙심이 깊었으나 가톨릭에 가까운 영국 국교회를 신봉하려는 그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하여, 의회와 더욱 더 커다란 갈등이 있었으며, 의회 중에서도 특히나, 개혁적 의지가 강하고 논쟁적인 성향의 청교도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하원의원들과는 대립적인 관계의 골이 깊었다.
 
- 부친 제임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당시 유럽에서는 개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로 나뉘어져 시작된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 내에는 개신교 편에 서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맞서자는 여론이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찰스 1세 시기까지 이어지면서 막대한 예산을  전쟁을 위한 비용으로만 사용하면서 실패로 끝난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왕과 의회와의 협상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성실하고 설득력 있게 대처하기보다는, 왕은 오히려 의회를 일방적으로 해산 시킨다. 또한 찰스 1세의 외교 정책들은 그 후에도 연달아 실패를 하게 되면서 1628년에 소집된 의회에서는, 왕에게 시민권을 보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등 4개 항목에 대한 권리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자, 왕은 전쟁과 자신의 정책이 연일 실패하게 되면서 생긴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재정 지원을 받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권리 청원에 서명을 하게 된다.
 
- 하지만, 이 권리청원 이후에도 왕의 정책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과세 정책에 있어서도, 지속적로 전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던 왕과 의회사이에서, 하원의원들은 왕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찰스 1세는 이듬해인 1629년, 왕권에 정면 도전하는 의회의 태도에 대해 무려 11년 동안 단독으로 의회 소집하지 않고 국정을 이끌어 가게 된다.
 
- 그러다 찰스 1세는 1640년에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승인받기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게 되지만, 의회는 자신의 뜻대로만 왕권을 행사하려는 찰스 1세의 도리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게 펼쳐지는 정책들과 왕의 주변에 있는 관리들의 잘못에 대해 탄핵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이런 식으로 청교도 세력이 이끌었던 하원 의회와 찰스 1세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런던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 튜더왕조 시절에 영국은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가톨릭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박힌 아일랜드에 영국 국교회 신자들을 이주하여 정착하게 만들어 영국의 식민지화 되었던 아일랜드는 찰스 1세가 영국에서 의회와 충돌하며 대내외적으로 혼란하였던 찰나에, 아일랜드에 거주하였던 영국 국교회 이주민들이 살해를 당하는,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벌어지게되니 외적으로 위기의 상황이었고,
 
- 내적으로는 영국 국교회 국민들이 아일랜드에서 목숨을 잃고 있는데, 찰스 1세는 가톨릭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는 것과 보수적인 주교들의 행동에 대해 몹시 불안하고 화가난 군중들이 밤마다 거리에 나와서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게 되면서 나라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 또한 의회는 온건파가 원하는 온건한 개혁과 크롬웰이 주도하는 다수의 강경한 개혁을 원하는의회파로 분열되어지는 형국을 보이자, 왕은 상비군을 조직하여 공식적으로 내전으로 치닫는 정치적인 형세에 들어서게 된다.

찰스 1세의 처형

- 하지만 1647년에 찰스 1세가 강경한 의회파에 의하여 체포되고, 왕을 비호하던 왕당파 세력이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하게 됨으로써 7년에 걸친 내전은 1648년에 의회파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 크롬웰이 이끄는 군부 세력은 온건파 의회세력이 왕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러한 세력의 일부 의원이 참여하는 것을 막고 1649년 1월에 개정한 ‘대영국에 대한 반역죄’ 라는 혐의로 찰스 1세를 특별법정에 세우게 되고, 왕은 이 재판에서 사형을 판결 받게 된다.
 
- 왕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 할 변호인 없이 재판에 임하였고 ‘오로지 신만이 자신의 잘못을 심판할 수 있으며, 자신은 신앙에 따라 백성들을 통솔하였고 그러다가 결국 끔찍하고 참혹하게 희생당하였을 뿐이다, 고 말하며 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 위엄과 기품을 지키면서 굳건하게 자신의 최후의 시간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찰스 1세가 1649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처형되고 영국은 군주정치와 영국 국교회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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