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문학

< 튜더(Tudor) 왕조 >

by mathilda72 2023. 6. 7.
반응형

1. 16세기 영국 사회

 
- 대내적으로는 흑사병과 농민의 반란,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백년전쟁(1337~1453)을 겪은 중세 말기의 영국은 영주들의 세력은 약해지면서 봉건제도가 흔들리게 되었으며, 백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장미전쟁(1455~1487)을 겪게 된다. 이 전쟁은 통해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두 영주 세력인 요크(York) 가문과 와 랭커스터(Lancaster) 가문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는데,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가 승리하여 튜더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로써, 영국인 봉건제도에서 절대왕정의 시대로 변화하게 되었고, 그 이후 아들인 헨리 8세와 그의 손녀이자 영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추앙받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였던 16세기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변화와 사회적 충돌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영국의 문학적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특히 헨리 8세가 집권하던 시기에 영국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설립되었고 이것은 종교 개혁의 시작이자, 이후에는 신앙 갈등과 정치적 갈등을 조장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릴 만큼 잔인하였던 메리 여왕 뒤에 왕위를 계승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민을 화합하기 위해 사리에 맞고 건실한 종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 이 시기의 영문학 작품에 영향을 준 역사적 배경을 왕가의 사실적 기록을 바탕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2. 튜더 왕조(Tudor dynasty)

 
- 1485년부터 1603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왕조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정치적•종교적•사회적•외교적•사상적으로 급격하였던 정세를 바로잡아 문화사적으로는 찬란한 르네상스를 꽃피웠고 국가적으로는 강대한 유럽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1) 헨리 7세((Henry Ⅶ, 1457~1509)

헨리 7세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귀족들을 억압하고 절대왕정을 추진한 헨리 7세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통상 조약을 맺어, 양을 기르며 목축업을 했던 영국이 옷감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되며, 이 때문에 농토는 목양지로 바뀌게 되자 농토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 들면서 런던은 상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성장으로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고 부가 축적된 런던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2)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

 

1509년 18살 때의 젊은 헨리 8세

-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왕세자가 된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 부왕인 헨리 7세는 맏아들 아서 대신에 둘째 아들 동생 헨리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로 정하고 며느리이자 아서의 미망인이었고 헨리의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을,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혼인 관계로 강화하고자, 둘째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젊고 스페인과의 동맹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헨리는 형수와 약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부왕이 임종하고 2개월이 지나서야 혼인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에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 지 20년 만에 별거하며 이혼을 요구하는데, 이혼하려는 그의 개인적인 사유는 영국에서의 종교 개혁(1533~1540)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 헨리 8세는 1520년대 초부터 왕비의 궁녀 출신의 정부(情婦)인 앤 불린(Anne Boleyn)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로마 교황청과 오랜 갈등 끝에 헨리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왕을 수장으로 하는 국교인 성공회(Church of England)를 세워 이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이로써 로마와 영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성공회는 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혼인을 한 앤 볼린은 1533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출산하였으나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헨리의 소망이었던 아들을 낳지는 못하였고 이 둘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시기에 헨리는 또 다른 정부를 만나게 된다. 앤과의 결혼을 위해 가톨릭과 단절했던 헨리는 근친상간을 하고 반역을 조장했다는 죄명으로 앤을 런던탑에서 처형하였다. 그의 생애에 왕비는 6명이었으며, 이 중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친인 앤 볼린을 비롯한 두 명 왕비는 처형을 당하였고 두 명 왕비와는 이혼하였다.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들

 
- 반체제적인 귀족의 영토를 박탈하는 한편 이혼과 종교 문제를 비롯하여 왕실을 비판하는 문학인들의 활동을 금하였고,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1536년과 1539년에 해산시키면서 영유하고 있는 땅과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지방과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왕이 직접 관여하여 종교를 개혁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절대왕정을 강화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3) 메리 1세(Mary I, 1516~ 1558)

 

메리 1세

-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메리는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재혼하여, 공주로서의 자격이 정지되었고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가 출생으로 메리의 왕위 계승권마저 빼앗겨 서녀로 취급받았으나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에 의해 간신히 공주로서의 신분이 복권되었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부왕인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의 소생인 에드워드 6세의 치하에서는 가톨릭 신앙과, 통일령 및 신기도서의 거부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그가 1553년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죽자 귀족들과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메리는 스스로 여왕 즉위를 선언하며, 사실상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된다.
 
- 메리 1세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을 뒤엎고 로마 가톨릭의 원상 복귀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300명에 달하는 성공회 성직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처형했고 이로 말미암아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게 되었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영화 '천일의 앤(1971년)' 중에서 앤 볼린과 헨리 8세

 
-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모친인 앤 불린이 간통죄로 참수되자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는 물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이복 언니 메리 공주에게서는 엘리자베스의 모친이 자신의 어머니인 캐서린을 내쫓았다는 이유로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를 받았고 부친 헨리 8세는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냉대했기 때문에 늘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558년 이복 언니인 메리 1세가 후사 없이 병으로 사망하자,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 기독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한쪽으로 치우 것을 피하는 중용(Via Media)정책을 선택하여 종교적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종교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경제적으로는 조세 개혁을 통해 조세의 체계를 공평하게 구축하고 국내의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제조업 육성하였으며, 구빈법을 제정하여 사회복지에 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구빈세로 장애인과 고령의 시민들을 돌보는 등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스페인을 견제하였고, 해적들의 활동을 허용하여 영국의 해외 상업 이익을 보호하는 것 외에도 영국을 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