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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 신고전주의와 명예혁명 >

by mathilda72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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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고전주의

 
- 영국 문학에 있어서 18세기는 1660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789년까지에 해당하거나 혹은 『서정담 시집』(Lyrical Ballads)라는 시집이 출판된 1789년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하며,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18세기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된다.
 

1) 『서정담 시집』(Lyrical Ballads)
 

 
1798년 출판된 이 시집은 영문학에 있어 낭만주의 시대를 여는데 공헌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년~1850년)와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년~1834년)의 시작의 모음집이며, 이는 문학에 있어서 영국의 낭만주의 운동의 시초가 된다.
 

2. 시대적 측면

 
- 왕정이 복고 된 이후 통치자인 찰스 2세가 집권을 시작하였던 초기에 흑사병이 1665년 다시 발생하게 되고 런던에서 1666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큰 혼란을 겪었고, 또한 찰스 2세는 비록 부친인 찰스 1세보다는 유연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왕정이 복고된 후에도 의회와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하였지만 사망할 때까지 20여년간 영국의 국왕 자리를 수호해낸다.
 
 

-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가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전 왕인 찰스 2세를 통하여 영국은 왕정이 복고되기는 하였으나, 크롬웰이 주축이 되어 영국에 최초의 공화정을 수립하는데 기여하였던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왕권 강화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또한 찰스 2세부터 지속된 의회와의 갈등 상황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중심으로 구성되어진 의회와 제임스 2세가 가톨릭교의 신봉자였기에 더욱 심화되어, 1688년에 ‘명예혁명’을 통해 급기야 제임스 2세를 물러나게 한다.
 

3.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

 
-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차남이자, 왕정의 복고로 인해 공화정을 끝낸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 2세는 아버지 찰스 1세와 성향이 비슷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 찰스 2세에 비하여 진중하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수차례 세우며 뛰어난 군인이자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던 그는, 왕정이 복고가 되면서 영국 왕실로의 귀환을 하게 되어, 찰스 2세를 지원하며 나라의 정치를 운영하는 데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던 제임스 2세는 1666년에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총체적인 책임을 맡아 당시에 화재를 진압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을 한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성향으로 볼 때 부친인 찰스 1세와 많은 점에서 닮아 있었으나, 찰스 2세의 통치 기간에 국정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며 실력을 검증 받은 제임스 2세는, 국교회 중심으로 이뤄진 의회와 대립하는 부분이 없이 51세의 나이로 1685년 4월 왕위에 즉위를 하게 된다.
 
- 그러나 그 해 6월에 형인 찰스 2세의 혼외자가 영국 국교회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를 문제 삼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 아버지 찰스 1세가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정권에 도전하려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은 것처럼, 제임스 2세도 이 사건으로 인해 왕권에 항의하는 세력을 강하게 응징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는 보였으나, 자신이 신봉하는 가톨릭과 이를 반대하는 의회,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도는 분위기를 바라보는 민심에 대해 타협적인 방향을 모색하기보다는 방어적인 대응을 하게 되면서 그가 정권을 유지하는 데 부정적인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싹을 틔워 나간다.
 
- 국교회 중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보수파와는 부친인 찰스 1세와 조부인 제임스 1세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비록 종교가 다를지라도 제임스 2세의 진중하고 성실함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던 국교회 보수파는, 제임스 2세가 개신교 전통을 무시하고 영국을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나 스페인의 종속국으로 전락시키는 듯한 ‘포고령’을 공지하자 제임스 2세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 ‘포고령’ 공지로 인하여 나라에는 긴장감이 돌기도 하였지만, 의회, 국교회, 그리고 국민들은 대다수의 입장은 제임스 2세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조금만 기다린다면, 그의 딸인 메리와 앤이 국교회 신자이고 그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을 때, 과거처럼 유혈 사태 없이 나라는 안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시기에 가톨릭 신자이자 제임스 2세의 왕비인 메리가 아들을 출산하게 되니 앞으로 영국은 정말 가톨릭을 신봉하는 국가의 종속국이 될 수도 있다는 직접적인 위기감이 감돌게 된다.
 
- 이에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장녀인 메리의 남편 윌리엄에게 군사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 왕가 출신인 윌리엄 3세는,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영국에 오게 되었고, 제임스 2세는 자신의 건강상의 문제와 병사들이 이탈하는 등의 문제로 인하여 물러나 프랑스로 도피를 하게 되고 제임스 2세는 대략 3여년 만인 1688년에, '피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진 이른바 ‘명예혁명’으로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1689년 의회는 공식적으로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선언한다.
 

4. 명예혁명의 의의

 
- 의회는 군대의 조직과 조세,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을 의회의 정하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권리 선언’과 ‘권리장전’을 법으로 정하였고, 이 법에 따라 앞으로 왕위 계승은 의회가 정한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내용을 규정하게 되며, 이 법에 따라 제임스 2세의 큰 딸과 사위는 메리 2세(Mary II, 1662~1694)와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2~1702)가 되어 공동 왕위를 받게 된다.
 

왕위를 계승받는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 이를 통하여, 세습되는 군주가 아닌 의회와 법을 통한 ‘입헌군주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통치에 관련한 권한 결정적으로 의회가 갖게 되어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의회 정치가 발전하고 그에 따라 민주적인 시민의 권리가 확장될 수 있는 법적인 기반이 조성되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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